주제:토플 강의 비교문학 번역
월요일 오후 네 시, 인문관 삼 층 세미나실이었다. 창밖으로 십일월의 황량한 잔디밭이 보였다. 다음 날 비교문학 세미나를 앞두고 수강생끼리 모이는 준비 모임이었다. 이번 주가 학기 6번째 세미나였다.
나는 한서윤, 스물다섯 살, 석사 1년차다. 서울에서 국문학을 하다가 번역 연구를 하러 왔다. 이 학과는 학생의 다양성을 자랑했지만, 토론에서 입을 여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었다.
토론 진행은 수강생이 교대로 맡는 게 이 세미나의 규칙이었다. 이번 주 읽기 자료는 1930년대 산문가 한도윤의 수필 「새벽의 문장」 영역본이었다. 진행은 원래 내 차례였다.
박사과정 4년차 그랜트가 순서를 바꿨다. "서윤, 이번 주는 내가 할게. 국제학생은 슬라이드나 만들어. 인용문 몇 개만 깔끔하게 넣어 줘. 교수님께는 내가 말씀드릴게."
옆자리 루시아가 팔꿈치로 내 팔을 쿡 찔렀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발표 공포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원래 내 차례라는 말이 그 순간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랜트는 학회 발표를 세 번 한 선배였다. 콜 교수님도 그의 의견에 자주 의지했다. 그의 토론 원고는 미리 공유 폴더에 올라와 있었다.
원고의 중심은 영역본 서른두 쪽의 한 문장이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고독은 자랑이다!"쯤 된다. 그랜트는 이 느낌표 하나로 결론 내렸다.
작가는 고독을 그 자체로 아름답게 여겼고, 그 태도가 수필 전체를 묶는다는 것이다. 원고에는 철학적인 해설이 열 쪽 넘게 이어졌다.
슬라이드에 넣을 쪽 사진이 필요해서 저녁에 도서관에 들렀다. 세미나 자료집은 초판을 복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가에는 2019년 재인쇄판이 따로 꽂혀 있었다.
나는 책을 허벅지 위에 펴 놓고 맨 앞의 역자 서문부터 읽었다. 열한 쪽이었다. 슬라이드만 만들면 되는 일이었지만, 서문을 건너뛰는 건 내 기준에 맞지 않았다.
아홉 번째 쪽에서 손이 멈췄다. 역자는 초판의 실수 하나를 털어놓고 있었다. 서른두 쪽의 그 문장은 원문에서 두 문장이었다. "고독은 자랑이다. 그러나 오래 자랑할 것은 못 된다."
초판을 조판할 때 둘째 문장이 빠졌고, 편집자가 마침표 자리에 느낌표를 찍었다고 했다. 역자는 접속사 하나가 사라지면서 문장의 뜻이 전혀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고 적었다.
서문의 마지막 단락은 더 짧았다. 한도윤의 산문은 한 문장을 세우고 다음 문장에서 그것을 조금 거둔다. 그 미묘한 호흡이 이 작가의 특징이며, 재인쇄판은 그 호흡을 살리려고 문장을 끊지 않았다.
각주에는 '자랑'이라는 낱말도 모호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 시절 문맥에서는 자부심과 부끄러움이 함께 담긴 말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책 뒤쪽 색인에서 '고독'을 찾아 그 문장에 책갈피를 꽂았다. 그랜트의 원고는 통째로 빠진 문장 위에 서 있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기숙사로 돌아가는 내내 생각했다.
밤에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그랜트가 고른 인용문을 그가 원한 순서대로 각각 한 장씩 넣었다. 과장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장에는 재인쇄판 아홉 번째 쪽 사진 한 장만 붙이고 설명은 달지 않았다.
새벽 한 시, 루시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따 세미나 기대할게." 나는 답 대신 완성한 슬라이드 파일을 보냈다.
화요일 세미나는 그랜트의 발표로 시작됐다. 그는 첫 장부터 느낌표를 가리키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작가의 고독은 패배가 아니라 포부라고 했다.
"이 느낌표가 작가의 정신을 보여 줘요." 그랜트가 웃으며 말했다.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콜 교수님은 안경을 고쳐 쓰고 화면을 응시했다.
"원문에도 이 느낌표가 있나요?" 교수님이 물었다. 그랜트는 잠깐 난처한 얼굴이 됐다가 금방 침착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원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없어서, 번역본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루시아가 이번에는 팔꿈치 대신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용기를 내 손을 들었다. "제가 읽을 수 있어요. 마지막 슬라이드를 띄워도 될까요?"
화면에 재인쇄판 아홉 번째 쪽이 떴다. 나는 서문의 그 단락을 영어로 천천히 읽고, 빠진 둘째 문장을 우리말로 한 번 더 읽었다. '그러나'에서 세미나실이 조용해졌다.
그랜트가 짜증난 얼굴로 책을 달라고 했다. 나는 재인쇄판을 건넸다. 그는 몸을 숙이고 서문을 첫 쪽부터 끝까지 읽었다. 각주까지 다 읽는 데 십 분쯤 걸렸고, 아무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책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화면과 책을 한 번씩 더 보더니, 한 발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모두 들었죠. 내가 맹목적으로 초판만 믿었어요." 그랜트가 세미나실을 한 번 둘러봤다. "서윤, 어제 슬라이드나 만들라고 한 말은 취소할게. 이 문장은 네가 제일 정확히 읽었어. 남은 토론은 네가 진행해."
콜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번 주 진행자가 서윤 씨였죠. 이상적으로는 원문과 번역을 같이 놓고 읽는 게 맞아요. 자료집을 재인쇄판으로 바꾸는 것도 다시 고려해야겠네요."
나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나갔다. 첫 질문은 하나였다. 둘째 문장이 빠지면 독자는 무엇을 빼앗기는가. '자랑'의 동의어를 찾던 사람들이 곧 반의어 쪽으로 생각을 넓혔다.
자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수필 전체가 달라졌다. 토론은 생각보다 복잡해졌지만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받아 이어 갔다.
루시아는 스페인어 번역본도 초판을 따랐는지 확인해 오겠다고 했다. 수잔은 한도윤 문장의 문법의 특징을 따로 정리하겠다고 했다. 토론이 한창일 때 시간이 끝났다.
세미나가 끝나고 그랜트가 다가왔다. "내 학위논문에 넣은 번역 인용, 한번 봐 줄래?"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가볍게 웃고 먼저 나갔다.
나는 책갈피를 빼서 서문 아홉 번째 쪽에 다시 꽂았다. 창밖 잔디밭에는 벌써 가로등이 들어와 있었다.